음운 규칙
언어마다 음소 목록이 다르지만, 비록 음소 목록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 음소들의 배합은 같지 않다. 같은 자음이라 하더라도 한 언어에서는 어두나 어말에 올 수 있는데 다른 언어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어떤 언어에서는 자음들이 서너 개가 이어 결합할 수 있지만 다른 언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또 어떤 언어에서는 서로 이웃해 놓일 수 있는 음소들이 다른 언어에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아 그 중 한 음소가 다른 음소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마디로 언어마다 음운 규칙 (phonological rule)이 다른 것이다. 음절에서의 분포 제약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본 바 있지만 그 이외에 한국어의 음운 규칙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여기에서는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간추려 보기로 한다.
1) 중화
총론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한국어의 자음은 어떤 자음이나 할 것 없이 음절말 위치에서는 불파음(不破音)으로 실현된다. 영어의 belt의 t처럼 숨의 막힘을 파열(개방)하거나 gas의 s처럼 마찰을 지속하는 일은 한국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들을 한글로 전사할 때에는 모음 ‘’를 넣어 ‘벨트, 개스'로 하는 편법을 쓰는 일에 대해서도총론에서 지적한 바 있다.) 한국어에서는 자음을 발성한 후 입술을 다물고 있거나 구강 내의 막힘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음절말에서는 'ㄴ, ㅁ, ㅇ'과 같은 비음이나 'ㄹ'과 같은 유음도 예외없이 불파음으로 실현되어 영어의 little이나 button의 ‘1’이나 ‘n’과는 달리 한국어의 비음이나 유음은 성절음이 되는 법이 없다. 특히 장애음, 즉 폐쇄음과 파찰음 및 마찰음들이 불파음으로 실현되는 일은 한국어의 여러 다른 음운 규칙에 영향을 미치므로 음절말에서의 이들의 불파화 현상은 한국어 음운론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므로 각별한주의를 요한다.
음절말에서의 불파화에서 파급되는 가장 직접적인, 또 가장 중대한 음운 규칙은 중화 규칙이다. 음절말의 불화에 의해 음절말에서 실현되는 자음의 수는 7개에 불과하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ㅇ'이 그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자음들은 이 7개의 자음 중 어떤 자음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1) a. 부엌→부억, 밖→박
b. 밭→ 받
c. 앞→ 압
(2) a. 옷온, 있다 인다
b. 젖→ 절
c. 빛→빋
(거센소리된소리)
이상에서 보면 폐쇄음의 격음과 경음은 해당 평음으로 바뀌고, 치찰음(마찰음과 파찰음)은 어느것 할 것 없이 모두 ‘ㄷ’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초 다른 단어이던 것들이 동음어가 되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
(3) a. 입:잎[입]
b. 낫[낟] : 낮[낟] : 낮[낟]
이처럼 애초 별개 음소로 대립되던 것들이 특정 환경에서 그 변별력을 상실하는 현상을 중화(中和; neutralization)라 한다.
중화는 음절말 위치에서 실현되기 때문에 어떤 단어 뒤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가 오면 중화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즉 ‘꽃이, 꽃으로’는 [꼬치, 꼬츠로]로 실현되므로 ‘ㅊ’은 음절말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모음으로 시작되는 형태소일지라도 그것이 실질적인 단어일 때에는 중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복합어를 이룰 때도 마찬가지인데 이 점에서 복합어를 이루는 구성요소 사이에는 단어의 경계가 놓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에 일단 중화된 음절말 자음은 후속 모음의 음절 초두로 발음되기도 한다.
(4) a. 젖(#)어미→전#어미→저더미b. 겉(#)옷→걷#온거돋c. 무릎(#)아래→무릅#아래 무르바래
종래의 표기법에서는 중화 현상을 표기법에 반영하여 팔종성법(八終聲法)내지 칠종성법을 채택하였었는데 현행 표 기법은 형태소의 기본형, 즉 그 기저형을 밝혀 적는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그만큼 표기와 발음이 멀어진 상태인데 이것은 글을 읽을 때보다도 남의 말을 듣고 받아쓰기를 할 때 주의를 요하게 한다.
2)동화
서로 이웃해 있는 두 음 중 하나가 나머지 음의 영향을 받아 그와 같거나 가까운 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동화(同化); assimilation)라 한다. 한국어에도 많은 동화 현상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표기법에서는 동화되지 않은 상태의 기본형을 택한다. 다음에 표기법을 먼저 보이고 그 동화형을 화살표로 보이기로 하겠다.
한국어의 동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 비음화 규칙일 것이다. 이것은 폐쇄음이 비음 앞에서 비음으로 바뀌는 규칙으로서 ‘ㄱ→ㅇ, ㄷ→ㄴ, ㅂ→□'처럼 폐쇄음이 비음으로 바뀌되 조음위치가 같은 비음으로 바뀌는 규칙이다. 이때의 폐쇄음 ‘ㄱ, ㄷ, ㅂ'은 중화 규칙을 거친 결과이거나 자음군의 하나가 탈락한 결과일 수도 있다.
(1) a.․ 국물→궁물, 먹는다→멍는다b. 부엌만 부억만 부엉만 c. 묶는다 →묵는다→뭉는다
b. 붙는다 붙는다 →분는다 ․ 법망→범망, 돕는다→돔는다 b. 앞마당 압마당→ 암마당c. 없는 업는 엄는
(2) a․ 받는다→받는다
‘ㄹ’에 이웃하는 ‘ㄴ’이 그 ‘ㄹ’에 이끌려 'ㄹ'로 바뀌는 규칙도 대표적 동화의 하나다. 한국어에서 'ㄹ'은 ‘ㄹ’ 이외의 어떤 자음과도 바로 이웃해 분포하지 못한다. 따라서 부득이 그러한 분포가 빚어지는 상태가 되면 두 자음 중 하나가 다른 자음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데 ‘ㄹ+ㄴ’이나 ‘ㄴ+ㄹ'의 조건에서는 'ㄴ'이 'ㄹ'로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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